트럼프, 핵 협상 앞서 이란에 제재 완화 ‘당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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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핵 시설 재건 가정 질문엔 “언제든 재공격” 답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이란의 휴전이 시작된 24일(현지시간) 이란의 대중국 원유 수출 문제를 언급했다. 휴전 성과를 강조하려는 의도인 동시에 핵 협상을 앞두고 대이란 제재 완화를 시사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은 “협상 테이블에서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돼 있다”며 미국에 유화 메시지를 보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동하는 전용기 내에서 트루스소셜에 글을 올려 “중국은 이제 이란에서 계속 석유를 살 수 있게 됐다. 바라건대 미국산 원유도 많이 사기를 바란다”면서 “이렇게 할 수 있게 돼 영광이다”라고 썼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에 대한 ‘최대 압박’ 기조에 따라 중국 등 이란에서 원유를 구매하는 국가에 ‘2차 제재’를 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이란 간 휴전 합의가 이뤄진 다음날 이란의 원유 수출을 허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은 것이다.
일단 트럼프 행정부는 이 발언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태미 브루스 국무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대통령은 그가 기대하는 바를 시사한 것”이라며 “대통령보다 앞서가거나 그의 전략이 무엇이 될지 추측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백악관 고위관계자가 이란 원유 수출 제재는 유지될 것이며 대통령이 각국에 미국산 원유 수입을 늘리도록 계속 독려해왔다고 전했다고 밝혔다.
다만 블룸버그는 대이란 제재를 담당하는 재무부와 국무부 관계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놀랐으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이란과는 핵 협상, 중국과는 관세 협상을 염두에 두고 일종의 신호를 보낸 것이거나, 휴전으로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가 사라졌다는 점을 과시하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나왔다. 폴리티코는 미국이 중동 평화와 무역 협정을 연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미국은 이란과의 핵 협상 재개를 저울질하고 있다. 스티브 위트코프 미 대통령 중동특사는 이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이제 이란과 마주 앉아 포괄적인 평화 협정을 이끌어낼 시간”이라고 말했다.
페제시키안 대통령도 셰이크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협상 테이블과 국제적 틀 내에서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며 핵 협상 복귀 의사를 내비쳤다. 그는 또 “이란은 단지 정당한 권리를 추구할 뿐이며 그 이상의 요구는 없다. 결코 핵무기를 추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달해달라고 UAE에 요청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 나토 정상회의에 앞서 취재진이 ‘이란이 핵시설을 재건하려 한다면 다시 공격할 것이냐’고 묻자 “물론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미군의 폭격으로 핵시설) 내부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족 63% “트라우마 여전”지원 못 받아 사비로 상담
안전·목숨 경시하는 사회대형 인명사고 근절 못해
김동희씨(72)는 29일 아침 검은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간밤에 꾼 꿈에 동생 송희씨가 나왔다. 무용을 하던 동생은 꿈에서도 예뻤다. 김씨는 동생의 잔상을 마음에 품고 서울 서초구 양재 매헌시민의숲으로 향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있는 곳이다. 30년 전 죽은 송희씨의 이름도 그곳에 있다.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와 삼풍백화점붕괴참사유족회는 이날 오전 11시 서초구 양재 매헌시민의숲 삼풍참사위령탑 앞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서른 번째 맞이하는 추모식이었다. 유족들은 검은 옷에 분홍색 리본을 달고 위령탑 앞에 마련된 의자나 돗자리에 앉았다. 유족들은 추모식 내내 눈가를 훔치며 사랑하는 사람을 애도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는 국내 단일 사고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지상 5층, 지하 4층 규모의 삼풍백화점은 사고 당일 오후 5시57분 왼쪽부터 기울기 시작해 20초 만에 완전히 주저앉았다. 502명이 사망했고 6명이 실종됐으며 937명이 다쳤다. 수사를 통해 부실 시공과 이를 덮어준 공무원의 뇌물 수수 등 부패의 진상이 드러났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유족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재난피해자권리센터가 발표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30주기 유가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유가족 중 63.0%가 여전히 반복적 분노, 무기력 등을 겪고 있다. 82.3%는 참사 이후 전문가의 심리 지원을 받지 못했다.
참사로 남편을 잃은 김모씨(59)는 “지금도 건물 지하에 가지 못하고 문을 열어 놓고 잔다”며 “남편을 잃고 가족들이 다 무너졌는데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해 사비로 심리 상담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동희씨도 “동생의 시신이 마지막쯤에 나왔는데 그때 제 머리가 하얗게 샜다”면서 “아직도 트라우마가 남아 있고 동생이 많이 그립다”며 울먹였다.
유족들은 참사가 반복되는 사회 구조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딸을 잃은 김윤아씨(72)는 “세월호도 그랬고 이태원도, 무안공항 제주항공 사고도 그랬듯 참사가 계속된다”며 “30년이 흘렀지만 바뀐 것이 크게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명희씨(52)는 “아직도 큰 건물에 들어갈 땐 ‘여기도 무너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며 “여전히 우리 사회는 안전과 목숨, 이 두 가지를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민주노총 건설노조가 공개한 건설노동자 106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81.7%가 ‘삼풍백화점과 같은 대형 참사가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답했다. 노동자들은 경쟁과 이윤을 위해 값싼 자재를 쓰고 공사 기간을 단축하는 등 관행이 대형 참사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추모식엔 세월호 유가족과 일반 시민 등도 참여했다. 이들은 유족들을 위해 ‘기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강소연씨(44)는 “유족들이 스스로 잊히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마음이 아팠다”며 “참사가 반복되는 만큼 사회적 차원에서 삼풍 참사를 기억할 수 있는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유가족인 최순화씨(61)는 “유가족에게 해줄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며 “유가족이 참사 이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채 해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사건의 ‘키맨’으로 불리는 김계환 전 해병대 사령관이 오는 27일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 항명 혐의 사건 항소심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한다. 김 전 사령관이 지난해 말 전역한 이후 공개 석상에서 입을 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특검팀은 김 전 사령관의 증인신문을 검토한 뒤 박 대령 항소심 공판의 이첩 요구 여부를 추가로 논의해 결정할 전망이다.
25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채 해병 특검팀은 오는 27일로 예정된 박 대령 항소심 공판을 검토한 뒤 이첩 여부와 시기를 판단할 전망이다. 앞서 특검팀은 법리검토 결과 국방부(군검찰)에 박 대령의 항소심을 이첩해달라고 요구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해당 재판을 실제 이첩받을지 여부에 대해서는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관련 기사 : [단독]채 상병 특검팀, ‘박정훈 항소심’ 이첩 검토···공소취소 여부 관심)
오는 27일 공판에서는 김계환 전 사령관이 증인으로 출석한다. 이날 재판은 채 해병 특검팀이 출범한 이후 처음 열리는 박 대령의 항소심 공판이자, 김 전 사령관이 전역한 이후 처음으로 법정에서 서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김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6일 전역했다. 특검팀은 이 공판 내용을 향후 수사에 ‘주요하게 참고하겠다’는 입장이다. 김 전 사령관은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상부로부터 ‘수사대상 축소’ 지시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로 채 해병 수사외압 의혹의 ‘키맨’으로 불렸다. 김 전 사령관은 박 대령이 주장한 ‘VIP(윤 전 대통령) 격노 의혹’이 사실과 다르다며 부인해 왔다.
법조계에서는 김 전 사령관의 증인신문 내용이 특검팀의 향후 박 대령 항소심 공판에 대한 이첩 요구 결정 및 결정 시점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 재판의 증인신문이 유의미하다고 판단되면 특검팀은 향후 예정된 재판들을 더 지켜볼 가능성도 있다. 오는 7월11일에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에 대한 증인신문이 예정돼 있기도 하다. 이 전 장관 측은 ‘예정된 증인신문 기일에 출석할 예정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출석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특검 수사 기간이 최장 120일로 3대 특검 중에선 가장 짧은 만큼, 재판을 지켜보는 것에 실익이 없다고 판단이 되면 보다 빠른 시점에 재판 이첩 요구를 결정할 가능성도 있다. 채 해병 특검법엔 채 상병 사망사건과 그 수사에 대한 외압 의혹뿐 아니라 ‘수사과정에서 인지된 관련 사건’도 수사대상으로 명시돼 있다. 또 수사대상 사건의 재판이 진행 중인 경우 특검이 이 사건을 이첩받아 공소취소 여부 결정을 포함한 공소유지 업무를 할 수 있게 돼 있다.
이명현 특검은 이날 오전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과 만나 “박 대령 사건(재판)은 지금 증인신문이 이어지고 있다”며 “우리가 바로 이첩받아서 재판을 중단시키는 것보다는, (특검에서) 조사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금 증인으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첩 여부와 관련해) 어떤 게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데 좋은 지 검토 중”이라며 “아직 확정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특검은 이어 ‘김 전 사령관 증인신문에 특검보들이 재판에 참석하느냐’는 취재진의 물음에 “일단 갈 것”이라며 “(누가 갈 것인지는) 내부적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전 장관 측 변호인은 이날 이 특검 측에 박 대령에 대한 항소 취하를 검토하는 것은 권한 남용이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32개 회원국이 각국 국방비 예산을 2035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5% 수준으로 늘리는 안에 최종 합의했다.
나토 지도자들은 2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정상회의 공동성명에서 전력증강 계획인 ‘나토 군사역량 목표’를 이행하기 위해 연간 GDP의 최소 3.5%를 핵심 국방 수요에 투입하고, 이를 위한 연례 계획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또 GDP의 최대 1.5%를 핵심 인프라 보호, 네트워크 방어, 방위산업 기반 강화 등 간접 안보비용에 지출하기로 합의했다.
이번에 합의된 GDP대비 국방비 총 지출 비율 5%는 지난해 회원국 평균 국방비 비율(2.61%)의 두배 가량이다.
나토 정상들은 또 “우리는 나토 규약 제5조에 명시된 집단 방위에 대한 철통같은 약속을 재확인한다”며 집단 방위체제를 인정했다. 공동성명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관련 언급은 제외됐다.
이 같은 결정은 미국이 유럽 방위에서 발을 뺄 것이라는 불안감이 확산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국의 방위비 분담을 줄일 필요가 있다며 나토 회원국에 국방비를 GDP의 5%까지 올릴 것을 요구했다. 유럽 주둔 미군 감축설도 꾸준히 제기됐다.
다만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유럽 국가들이 국방비 증액을 현실화할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독일 싱크탱크 신경제재단(NEF)은 ‘국방비 GDP 5%’를 달성하려면 나토의 유럽연합(EU) 회원국만 연간 6130억유로(약 969조원)의 지출을 늘려야 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앞서 벨기에 정부도 국방비를 GDP 5%까지 올리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3.5%로 기준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토 회원국 내에서 국방비 증액에 반대하는 여론도 거센 상황이다. 지난 22일 헤이그 시내에서는 군비 지출 증가와 전쟁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군비 예산을 늘릴 경우 복지·기후 등 분야의 예산이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나토의 국방비 인상이 전 세계 군비 경쟁을 가속화시킬 것으로 전망했다. 스웨덴 싱크탱크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지난해 이미 전 세계 각국의 군비 지출이 1988년 냉전 이후 최고치인 2조7180억달러(약 3915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했다.
나토 회원국이 국방비를 대폭 올리기로 합의하면서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국방비 인상 압박을 받는 한국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미 국방부는 한국을 포함안 아시아 동맹 국가도 국방비를 GDP의 5% 수준으로 지출해야 한다는 지침을 제시했다. 한국은 2025년도 국방 예산으로 GDP의 2.32%인 61조2469억원을 책정했다.
나희덕의 시에서 자연은 한 번도 단순한 풍경이나 고정된 사물이었던 적이 없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인간과 감응하는 대상에 가깝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발표된 <가능주의자>(문학동네, 2021)가 세계의 가장 낮은 곳에서 들리는 자연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였다면, 열 번째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이르러 시는 하나의 물질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시란 과연 어떤 물질일까.
시가 자연을 그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언어로 붙잡아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시집에서 자연이 명확하게 인지되거나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선 판단을 멈추고 감각에 집중해본다면 어떨까. 소리, 버섯, 장미, 유리, 산호초 같은 비인간 존재들은 이 시집에서 단지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감응하는 주체들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중 하나인 ‘세계 끝의 버섯’에서는 버섯이 여러 생명이 소멸한 이후에도 살아남는 생명으로 그려지고, 숲속의 균사체는 존재와 존재가 뒤엉긴 그물망으로 묘사된다. “바위와 이끼와 뿌리와 균사가 그물처럼 얽혀 있는 숲”에서 흰개미, 균류, 버섯은 서로의 생장을 도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가 얽혀 있는 매트릭스를 형성한다. 화자는 이러한 모습을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풍경으로 감각한다. 이는 시의 제목이 빌려온 인류학 저서 <세계 끝의 버섯>에서 애나 로웬하웁트 칭이 그려낸 ‘공진화(co-evolution)’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균류적 상상력은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로서 여러 생명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을 상기시킨다.
시집 표제작인 ‘시와 물질’은 더 나아가 물질의 생기를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이 시는 화학자이며 시인인 로알드 호프만의 화학적 발견을 참조하며 “심지어 시도 사람을 해칠 수 있”다고 인식한다. 이것은 인간 문명이 만들어낸 ‘시’라는 장르가 언제나 아름답고 따뜻하며 자애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시 역시 독극물처럼 발화하고 유통될 수 있는 하나의 ‘주체(agent)’로서의 물질이라는 인식론적인 전환에 가깝다.
그래서 이 시집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시는 무엇인가’ 혹은 ‘시는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의 방향을 이렇게 바꾼다. 시는 누구와 말하는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시인의 상상력’이 아닌 ‘담론과의 대화’로 구성된 이 시집은 여러 생태학자, 철학자, 예술가의 텍스트를 인용하거나 참조하면서, 텍스트의 감각과 시적 발화가 서로를 감염시키는 하나의 물질을 발명한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시인의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내면이 아니라 여러 학문, 감각, 생명 사이를 매개하는 관계성을 열어낸다.
어쩌면 시집은 반복적으로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그러나 시인은 직접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시와 물질’에서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을 인정하면서도, 시를 포기하거나 냉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기력함조차도 하나의 물질로서 깊이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렇다면 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꿀 수 있느냐’가 아니라 ‘세계를 감각하는 밀도를 바꿀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다. 시의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이 세계에서 남겨진 것, 흐릿한 것, 뒤엉기는 것을 감각하면서 세계를 감응하는 방식을 아주 조금, 그러나 확실하게 바꾸어놓는다.
<시와 물질>을 읽은 우리에게 시는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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